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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문인 아카이브/성북문인

[나중소] 청산리대첩의 숨은 영웅 나비장군


나중소의 생애

나중소(羅仲昭)1867.04.13~1928.08.18

 

















나중소 선생은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무예 실력을 자랑했다. 이로 인해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곧바로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한 선생은 1907년 9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국비유학생으로 유학해 일제의 군대의 특성을 공부했다. 이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1919년 3월, 나중소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해 10월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후에는 참모부장으로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을 겸임하며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기르는 힘썼고, 직접 일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나중소 선생이 참가했던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의 대승으로 유명하다.


이후 나중소 선생은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으나 6월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후임을 양성하기 위해 안도현 군인양성소에 들어가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다. 1922년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인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만주 독립군 단체를 모두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1924년 3월, 드디어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자,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된다. 1925년 3월, 애국지사들을 규합한 신민부자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을 맡았고, 9월에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餉官)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맡으며 무장항일투쟁의 훈련을 계속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갔다.


하지만 1928년 8월, 신민부의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나중소 선생은 돌연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청산리대첩

청산리천투에서 패하고 철수하는 일본군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골짜기와 완루구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고동하 등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일컫는다. 특히, 10월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는 약 1,300명의 병력으로 연합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6일 간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2,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독립군은 130여 명이 전사하고, 2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와 같은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만주지방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는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 국내의 독립운동도 지켜준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족에게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해 주었다. 


김좌진(金鎭) 1889.11.24~ 1929.12.25


 

그는 후방에 있기로 한 백발이 성성한 참모장 나중소장군이었다. “아 이 웬일이십니까?, 여긴 위험합니다. 후방에 가 계십시오.” 김좌진장군은 당황한 얼굴로 권면했다. “아닐세. 나는 자네들 곁에 있을라네. 자네들 곁에서 자네들 싸우는 광경을 보려하네. 저 원수 놈들이 하나하나 쓸어져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네” 나중소 참모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시선을 적군 편으로 보냈다. 백발이 성성한 가운데 동지들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동아일보 1958년 4월 22일에 연재된<대지의 성좌>에-


나중소와 성북 


성북구 정릉동 603번지 일대


나중소는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현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603번지)에서 아버지는 나윤철(), 어머니는 이() 씨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나주이며, 본명은 영훈(), 호는 포석(), 또는 일운()이다. ‘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부인은 밀양 손씨(1874년생)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일상(호적명 , 1906년), 인상(, 1915년생)이며, 딸은 장녀 복희(, 1897생), 둘째 아지(1908년생), 셋째 운상(, 1910년생) 등이다. 부인 손씨는 나중소가 만주로 망명할 때, 함께 가지 않고 서울 정릉동에 살았다고 한다. 나중소는 망명 당시 아들 2명과 딸 2명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큰 딸은 이미 시집을 간 이후였다. 큰 아들 일상은 25세 때 만주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당하였다. 둘째 인상은 만주에서 9세까지 거주하였다. 만주 거주 시에 경기도 파주출신이며,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아들 박영준()과 함께 기거 하였다고 전해진다. 딸 가운데에는 둘째 딸 아지가 아버지 나중소와 오래 동거하였다고 한다.


출처

*나중소 이미지 -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user/index.do 


*나중소의 생애 - 공훈전자사료관


*청산리대첩 - 국가보훈처

https://www.mpva.go.kr/mpva/main.do


*나중소와 성북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