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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문인 아카이브/성북문인

[조소앙] 삼균주의 자주국가를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생애 

조소앙(趙昻)1887.4.30 ~ 1958.9.10

본관 함안(). 호 소앙. 본명 용은(). 자 경중().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조선법학전수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 등을 지내고, 1919년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 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특별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려고 김구(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고,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1937년 한국광복진선() 결성에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5년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회 의장을 거쳐 1946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에 불참하였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에 《한국문원()》(1932), 《소앙집》, 《유방집()》(1933) 등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앙문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독립기념관 경내에 삼균주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조소앙의 선언문 

                  

         대동단결선언(1917. 7)



1917년 신규식,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해외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고 민족대회를 개시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다.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이 문서는 주권불멸론을 이론화한 것으로 순종의 주권 포기는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일본이 한반도를 점거하고 있어 재외 동포가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국민주권설을 주창하고 임시정부를 수립을 촉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또한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함으로써 1917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던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이 도산 안창호의 딸인 안수산에게 기증받은 이후 소장하고 있으며 2015년 12월에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52호로 등재했다.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1918)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고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작성한 사람은 조소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한국에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서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 내용은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고 민주의 자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한일합병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사기와 강박 그리고 무력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의 영토, 즉 한토()를 지키기 위하여 무력의 사용도 불사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 즉 맨몸으로라도 결사적으로 항쟁하여 독립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였다. 1919년 2월 1일 선포된 이 선언서는 이후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독립선언서에 대표자로 서명한 사람은 김교헌(신규식(박은식(안창호(김동삼(이시영(이동녕(신채호(유동열(김좌진()·김규식()·이승만() 등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한국의 저명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


3·1운동은 국제적으로 널리 퍼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대외적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말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던 입헌주의 사상을 통합하는 계기가 됐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집결한 신익희(), 조소앙(趙素昻)  각 지방 출신 대표자 27명은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를 개최하고 국호 '대한민국'과 10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이 헌장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조소앙이며, 이 헌장을 바탕으로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이후 임시정부 헌법은 1944년까지 다섯 차례 개정되며 근대적인 헌법의 형식을 갖추어 갔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정부·임시의정원과 같은 통치기구나 회계 등 근대 헌법의 핵심 조항들이 모두 포함됐으며, 헌법 내용도 구체화됐다. 이 헌법 체계는 1948년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1942.12)


1940년 6월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9월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6월에는 독일군이 소련을 기습한 데 이어 12월 6일 일본군이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미·일전쟁을 기대해왔다. 마침내 일본이 중국전장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동남아 일대의 자원을 손에 넣고자 미국을 선제공격하였다. 일본 전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 공군과 해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개전 반년 만에 욱일승천의 기세로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버마 등을 점령하였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미·일전쟁에서 결국 미국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일전쟁의 발발이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공표하였다. 국치 31년 만에 일제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비록 망명지 충칭에서 한 선전포고이지만, 한민족의 한이 담긴 민족사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순한문으로 쓰여진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의정원의원에서 의결을 거친 것이다. 


삼균주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조소앙(趙素昻)이 1918년부터 정립하여 내세운 민족주의 정치노선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 포함된 기초 이념이었다. 조소앙이 제창한 정치사회사상으로 중국 기독교 정치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일본 유학시절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창되었다. 삼균이란, 개인간·민족간·국가간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경제적 균등·교육적 균등을 의미하고 있다. 

'협력적 독립 운동'이 아닌 '투쟁적 독립 운동'이 주가 되어야 함을 명시했다는 것이 삼균주의의 핵심 개념이며,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적절히 배합하되 평등에 보다 역점을 두었다. 그의 삼균주의 이념은 '정치의 균등(균정권)', '경제의 균등(균리권)', '교육의 균등(균학권)'으로 구성된다. 각 항목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등, 민족과 민족 간의 평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다른 축으로 삼아 두가지 이상의 차원에서의 삼균(세가지 모두 균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보통선거제로 정권을 가지런하게 하고, 국유제로 경제를 가지런하게 하며, 국비 의무교육으로 교육을 가지런하게 할 것을 내세운 것이다. 


조소앙과 성북 


1948년 5월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 모습


"한 번은 정릉천 흐르는 미아리에 다리 있고 한 백사장 거기 냇물까지. 거기서 개인 연설을 했는데 저녁 7시인가 8시부터 시작해서 했는데 뭐 한 시간 두 시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올라가서 하는데 청중들이 가수한테 노래를 청하면 앙코르 지만, "선생님  한 말씀 더" 이런 식으로 하니까 하여튼 11시까지 연설을 4시간을 그냥...참 정력도 대단하세요. 대웅변가시고."

              - 삼균학회이사 이보철 (KBS 인물현대사 광복60년특집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2편 조소앙에서) -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거에 사회당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조소앙 자신도 서울 성북구(城北區)에 입후보, 출마하였다.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민국당 조병옥(趙炳玉) 후보와 맞붙었다. 이 선거는 조병옥이 경찰들을 동원하여 조소앙측 선거운동원 83명을 경찰서에 구금하는등 경찰을 동원한 압력과 테러 행위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선거 전날인 5월 29일에는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등 근거도 없는 사실무근의 벽보와 전단을 성북구 일대에 뿌렸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에 지프 차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선거결과 조소앙은 전국 최고 득표를 받아 민국당의 조병옥을 크게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했다. 6월 28일 조선인민군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피신연락을 받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끌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북되었다. 

조소앙은 해방 이후 납북되기 전까지 성북구 삼선교에 거주하면서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고 선거구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연설을 들을 정도로 유권자들 사이에서 조소앙의 인기는 대단했다.


                                                              성북구 조소앙 자택

 

 

삼선교·한성대학교역·조소앙 활동 터

 

서울시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유적지 인근 버스정류장 14개소에 독립운동가 이름을 나란히 표시했다. 정류소 표지판과 버스 노선도를 정비하고, 버스 안내방송을 통해 독립운동가의 활동 터 등 유적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4개 버스정류소를 정차하는 노선은 서울 시내버스 58개와 마을버스 4개이다.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 운동가들을 날마다 기억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 14곳에 이름을 새겼다"며 "정류소 표지판에 부착된 안내문을 통해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표기된 이유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북구에서는 삼선교·한성대학교역에 '조소앙 활동 터'와 서울다원학교역에 '한용운 활동 터'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조소앙 영상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실제 육성

https://www.youtube.com/watch?v=Jz6rM3m9BDA


조소앙 철학의 현대적 가치

https://www.youtube.com/watch?v=jREYSJ4z4vs 


*조소앙 기념관

http://www.chosoang.kr/


*서울시내 애국지사 이름의 버스정류장

http://www.dmook.co.kr/fileRoot/kr/w/o/wonypark/DigitalAlbumRoot/190608200527/default1.html


출처 

*조소앙 이미지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6%8C%EC%95%99


*조소앙의 생애 -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908&cid=40942&categoryId=33384


*대동단결선언서 - 시사상식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40169&cid=43667&categoryId=43667


*대한독립선언서 -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9481&cid=40942&categoryId=31778


*대한민국 임시헌장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3136


*삼균주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7%A0%EC%A3%BC%EC%9D%98


*제헌국회 이미지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https://news.v.daum.net/v/20190311192056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