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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 문인 아카이브/밤이 선생이다 : 문학비평가 황현산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3 – 황현산을 만나다③

성북문화재단의 '문인사 기획전'은  성북에 기반한 문인들 중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인물을 매년 한 분씩 조명하는 자리입니다. 2015년은 신경림 시인, 2016년은 조지훈 시인, 2017년은 황현산 문학비평가를 조명해보았으며 2017 성북문인사 기획전의 황현산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1 – 황현산을 만나다①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2 – 황현산을 만나다② 을 읽어보세요


 

 

 

 인터뷰: 황현산을 만나다 3. 사유의 언어, 감정의 언어

 

 

트위터 유저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트위터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트위터에서 단어의 뜻, 올바른 사용법 등을 말씀하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글에서 각별히 좋아하시는 단어나 표현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쓰다가 이런 단어는 저런 단어로 옮기면 좋겠단 생각이 들거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단어를 소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개인적으로는 전라도말 대신 서울말을 좋아합니다. 정확하고 말에 자존심 같은 것이 있으며 공부하기 좋게 되어 있어요. 전라도말이나 경상도말과 달리 객관적이고 표준어가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덜 섞여있죠.

 

시골로 내려갈수록 감정이 섞여 있어요. 내가 전라도 사람이다 보니 그 감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들과의 문학대회 자리에 다녀온 시인 김혜순 선생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재일조선인 작가 유미리와 함께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한국말로 유미리 선생하고 부르니 갑자기 얼굴이 이상해지더랍니다. 유미리 선생이 집에서는 싸우고 욕할 때만 한국말을 썼다 하더군요.

 

나에게 전라도 사투리라는 것이 아마도 유미리 선생이 한국말을 쓸 때와 비슷한 감정일 겁니다. 늘 저주하고 욕하고 싸우고 객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뒤에서 사바사바 하는 것. 예를 들어 경상도 사람들이 형님, 와이라십니꺼?”라고 말하는데, 전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공공연할 수 없는 일일수록 진한 사투리로 일을 벌이죠. 그래서 싫어합니다. 말을 또박또박 객관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감정이 담겨 객관적이지 못한 비공식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와 관련한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40년 전후(前後) 태생인 저희 부모님은 기초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분들이십니다. 제가 방학 때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외출하면서 밥을 차려놓고 메모를 남겨두곤 하셨는데 그 글이란 것이 맞춤법이 죄다 틀려있는 것들뿐이었죠.

 

이 경험은 저의 아주 원초적인 기억들 중 하나입니다. 정확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언어, 학교에서 배운 말이 아니므로 세련되지 않고 투박한 언어. 부모 세대의 집합적 경험이 새겨져 있는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언어. 한편으로 모종의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손쉽게 쳐낼 수만은 없는 어떤 민중세계의 언어. 때문에 그 앞에서 뭐라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양가감정과 맞닥뜨리곤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외국어로 된 글을 읽고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게 됐어요. 말들이 보편적 지성과 만나도록 하는 연습을 번역 작업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지식인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이론과 그 이론의 실천이라는 문제가 항상 남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세상사람 속에서 실천을 게을리 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인의 경우에는 책임져야 합니다. 사회적 무관심까지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치가가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버리고 정치할 수는 없듯 지식인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늘 정도(程度)의 문제입니다. 관심을 갖는 사람을 넓혀나가고, 하나의 주제를 자신의 주제로 만들려는 노력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을 통해 세상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의지. 인문학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순수한 진리탐구 영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실천의 영역은 일종의 분업입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활동하는 사람이 있지요.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많이 발전했어요. 공통 관심사도 늘어나고 또 중요한 문제에 대한 폭이나 깊이도 증가된 것 같습니다.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상상하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글을 통해 사회적인 이슈나 문제 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시고 의견을 내놓는 편이신데 작가들의 사회 참여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사회적 불의와 같은 문제에 둔감하면 다른 모든 것에도 둔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수성을 가지려면 사회정의 앞에서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정의 앞에 감수성이 없다면 어디서 감수성이 있겠습니까?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작가, 문인들이 성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나 소설가를 비롯 예술 종사자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 아직 오지 않은 세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세계,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세계를 위해서도 살고 있습니다. 신선이나 관념들만 살고 있는 것 같은 그 세계가 구체적인 이 세계를 구원해 준다고 봅니다. 정의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이 없다면 구체적인 정의도 실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를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환상적인 세계, 꿈의 세계, 우리가 그리워만 하고 어쩔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갈망 역시 예술에는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아닌 저 세계에 대한 갈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언어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호흡이 긴 글을 잘 읽지 않으며, 스마트폰 화면 속 단순한 글을 더 선호하는 듯 보입니다.

 

몇 년 전에는 언어유희 같은 극단적인 짧은 시들이 유행을 타기도 했습니다. SNS 공간을 통해서 시를 공유하거나 서점에서 시집 판매량이 증가하는 등 시에 대한 표면적 인기는 적어도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시집이 잘 팔리는 곳입니다. 다른 곳은 시가 다 망했어요. 외국문학 종사자 중에 한국문학이 시를 많이 읽어서, 시인이 많아서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까지도 보았습니다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관계가 빈번한 사회도 드물죠. 계속 부대끼고 사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 한국 사람에게 시를 많이 읽게 만드는 어떤 풍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시를 많이 읽는다는 말도 일견 틀리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중에서 발전을 빨리하는 사람이 있고, 발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으며, 발전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죠.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 수준에서 머물러 버리는 사람도 있으며, 또 시작은 스마트폰에서 했지만 굉장히 깊은 데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문제라고만 말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어느 예술가와 나눈 대화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기자들이나 교수들, 큐레이터들은 사실들에 반응합니다. 저희는 사실들이 존재하기 전에 무언가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이 합리적인 교수들이나 기자들의 그것과 나란히 보여지는 것을 그다지 원하지 않습니다. 진부해지거나 희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술가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이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까탈스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민한 사람은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민한 사람들 덕으로 그나마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광화문을 지나가다가 교통경찰에게 걸려 왜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가는지 물었더니 자기는 불을 켠 줄 알았다고 말했답니다. 다른 차들이 다 불을 켜고 있으니 자기 하나 켜지 않아도 워낙 환하니까 그냥 갔던 거예요. 예민한 사람들을 향해 뭐라 하지만 결국엔 예민한 사람 덕을 보고 사는 겁니다. 예민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고려시대이고 조선시대였겠지요.

 

어느 모임에서 제가 보들레르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교수가 보들레르는 누구의 철학 하에서 시를 썼느냐 물어왔어요. 누구의 철학을 신봉하며 글을 썼냐고 해서 저는 시는 누구의 철학을 신봉하고 철학을 대중화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쓰면 그 다음에 철학자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모르는 곳을 가는데, 시인이 먼저 어느 곳을 답사하면 철학자나 다른 학자들이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예술가나 시인들은 정신적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선구적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구체적인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어떤 예감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지 현실 없이 예감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주장할 때 언뜻 잘못하면 사회 현실과 예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으로 갈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급한 예술가의 주장에 타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어떤 작업을 해놓으면 철학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에 관한 항변으로 듣는다면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가 제시한 이슈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예술 속에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1 – 황현산을 만나다④ 로 이어집니다...

 

 


인터뷰 참여자:

김소원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

김주영 아리랑정보도서관 관장

김호진 아리랑정보도서관 사서

이종찬 문인사 기획전 아카이빙 코디네이터

장유정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