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북 문인 아카이브/밤이 선생이다 : 문학비평가 황현산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1 – 황현산을 만나다①

 

성북문화재단의 '문인사 기획전'은  성북에 기반한 문인들 중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인물을 매년 한 분씩 조명하는 자리입니다. 2015년은 신경림 시인, 2016년은 조지훈 시인, 2017년은 황현산 문학비평가를 조명해보았으며 2017 성북문인사 기획전의 황현산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인터뷰: 황현산을 만나다 1. 인간 황현산

 

 

고향인 목포 외에 유년 시절을 보낸 신안군 비금도를 언급하시면서 자신 삶의 척도가 그 섬에 있다고, 그 섬으로 세상의 척도를 재곤 한다던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비금이라는 섬에서 산 것은 7년입니다. 내 나이의 딱 1/10이죠.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부터 살기 시작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를 그 섬에서 보냈어요. 학교에서 새로운 개념을 배우면 그것에 해당하는 모든 예를 그 섬 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1km는 얼마다, 풀과 나무는 어떻게 다르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다 등 모든 개념을 그 섬에서 찾았어요. 기본적인 지식의 영상이 그 섬에 가 있었죠. 세상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도 그 섬에서 처음 익혔던 예를 늘 생각하게 돼요. 특히 거리 같은 것. 부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우리 집까지가 딱 10리였어요. 4km죠.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00km다 하면, 아 그 거리의 100배구나 계산하는 식이예요. 그 섬에 있는 산이라고 해봐야 봉우리가 300m가 채 안 되는 것입니다만 그 봉우리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산의 높이를 짐작했어요. 그 산의 몇 배 이런 식으로요. 비금에 부족한 것이 많았는데도 그 섬에 마치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섬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었어요.

 

 

 

혹시 고향에서 이방인이라 느낀 순간들이 있었습니까?

비금도에 살고 있을 때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다섯 살에 그 섬에 들어갔는데 다섯 살이면 실제로 섬에 적응하기 조금 늦은 나이입니다. 도시에서 다섯 살까지 살다가 그 섬에 들어가니 적응하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늘 섬이 고향이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적응을 잘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늘 아팠어요. 학교를 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오르지를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잡아줘야 오를 수 있었어요. 굉장히 유순했습니다. 힘이 없지도 않았는데 싸움하면 항상 졌죠. 학교에서 싸움 잘 하는 순서로 나는 항상 끝이었어요. 악착같이 싸웠으면 아마 그렇진 않았을 텐데 누굴 때릴 수가 없었어요. 군대에 있을 때도 때려본 적이 없어요. 섬에 사는 아이들은 다릅니다. 생활력도 강하고 이미 아이가 아닙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다시 목포에서 살게 됐는데, 목포는 목포대로 또 적응이 잘 안 됐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문학 소년이었기 때문에 또 사람들과 잘 안 맞았어요. 이상한 애 취급을 받고 실제로도 좀 이상했습니다. 늘 이방인 같이 느껴지는 기분이 대학교 다닐 때까지 있었어요. 대학을 불문과로 갔는데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그 당시 학과 정원 20명 중 겨우 2명 정도이고, 다른 이들은 그냥 불문과에 들어온 거였어요. 학교에 와서도 같은 학과 학생들보다는 국문과나 문학 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놀았죠.

 

 

 

황현산 선생님은 박정희 시대에 프랑스 현대시를 전공하셨습니다.

‘박정희’와 ‘프랑스 현대시’라니 상당한 심리적 낙차감이 존재했을 것이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반면 정신의 자유는 첨단을 달리고 있는 형국이었달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선생님은 1990년에 발표하신 평문 「르네의 바다: 불문학자 김현」에서 “불문학은 자의식의 문학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여기서 자의식은 치기어린 센티멘털리즘이 아니라 “그가 처한 역사적 자리야 어떠하든 모든 개화된 의식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함께 고뇌하는 자의식”이라 하셨습니다. 그 거대한 심리적 간극의 시기에 한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셨을 선생님의 마음의 풍경이 궁금해집니다.

 

제도권의 측면에서 보면 정말 ‘쓸데없는 것’을 공부하는 사람이었어요. 박정희 시대에는 사회적인 이슈가 근대화와 근대적 국가건설이었습니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말하는 것이죠. 그 당시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사회에서 잉여적 인간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불문학을 하고 있었으니 잉여 중에서도 잉여인 셈이었죠. 그렇다면 제도에 저항하는 세력 쪽에서는 달갑게 생각했는가 싶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극히 한가로운 유한계급의 문화를 익히고 동경하는 잉여적인 지식인으로 간주됐어요. 공교롭게도 양쪽 모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은 자기가 사는 곳 대신 자유, 평등, 정의가 있는 곳이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국 땅에서 하던 입장과 같았어요. 그 당시 외국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 문학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먼 곳에 자기 ‘조국’, 자신이 살아야 할 환경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 문학에도, 당시 국내 현실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외국 문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관심을 걸어야 할 턱 같은 것이 더 많았다 생각해요. 그저 한국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외국 문학 덕분에 발견하게 된 것이 많았습니다. 한편 늘 시선을 이곳만이 아닌 다른 곳에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볍게 생각한 것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중대성, 예민함, 날카로움 같은 것들을 보다 쉽게 느낄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공으로 불문학을 택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그와 관련된 글을 제가 몇 번 언급했는데 그때마다 달라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김지하 선생이 서울대 미학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에 김지하 선생이 모교 문예반을 데리고 목포에 내려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했는데 내가 그걸 봤어요. 지금도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하물며 그때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이해를 못했어요. 아마 김지하 선생도 이해를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굉장히 매혹적이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연극과 전혀 다른 종류의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불문과에 간 하나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 한분이 김용호 시인의 동생이었는데, 그 분이 알랭(Alain)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행복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에세이 몇 개를 소개해줬는데, 아 사람이 생각을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는 방법의 길을 보여주어 불문과에 가게 된 원인이 된 것도 있고요.

 

당시 새로운 것들, 새로운 시도나 생각의 방법 등이 대개 프랑스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고 대학을 불문과로 가게 됐습니다. 또 그곳이 한국에서 아주 먼 곳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있어요. 그때 한국은 너무나도 가난했고, 너무나도 초라했습니다. 그 당시 ‘여기 아닌 곳’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있었어요. ‘여기가 아닌 땅’을 ‘이 땅’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1990년 작고하신 불문학자이자 비평가인 김현 선생님이 선배이십니다. 고향과 연구 영역 등 여러 면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 김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교 아닌 비교의 순간과도 직면하셔야 했을 것 같고요.

 

일단 나는 내 동생 황정산과도 비교가 많이 됐어요. 동생도 비평가입니다. 나와 동생이 거의 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내가 먼저 다 써먹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생은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어디서나 ‘황현산 동생’으로 불렸다고 해요. 김현 선생과 저와의 관계에도 이와 비슷한 지점이 있습니다.

김현 선생과는 동향이에요. 고향인 목포는 원래 일본사람들이 건설한 도시입니다. 작은 곳이지만 일본인들이 이해한 근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측면이 있는 곳이지요. 근대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김현 선생이 불문학을 하게 되었는데, 저 역시 불문학을 전공하고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김현 선생의 경우처럼 목포의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마지막 사람인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도 글쓰기가 두려운 시기가 있었는지요.

 

늘 무섭죠. 글을 쓸 때 자기 스스로 비평하면서 이것이 맞는 말인가, 옳은 말인가 끊임없이 되물으며 써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비평하고 있는지 늘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는 없지요. 무서움을 감당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학원 외국문학 학과에서는 번역을 하고 주석을 달면 학위논문 대신 인정해 주기도 합니다. 대개의 경우 논문을 쓰지만 이따금 번역으로 논문을 대신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번역과 주석이 논문을 쓰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힘들다고 하더라도 자기책임은 경감됩니다. 반면 논문을 쓰면 전체를 자기가 책임져야 하지요. 무언가를 하려면 자기 손에 피를 묻혀야 합니다. 이걸 기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밤이 선생이다>를 보면 사진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어떻게 쓰시게 된 건가요?

 

원래 사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형적인 것을 좋아해요. 사진작가들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바빠서 사진전에 가지도 못하는데, 제 친구 중에 북 디자이너 정병규와 친합니다. 그에게 사진을 100장만 골라서 소개해주면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정병규에게도 특이한 개성이 있어요. 100장을 골라 달라 하면 그걸 고르는데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쿨투라>라는 문화 잡지에서 영화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는데,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사람은 많으니 대신 사진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했어요. 정병규에게 매달 한 장씩 사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니 강운구 선생의 사진을 추천해 주더군요. 강운구 선생의 사진을 5회 정도 쓰다가 덮어두고 나중에 <밤이 선생이다>에 구본창의 사진을 덧붙여서 출간했습니다. 구본창의 사진도 정병규가 골라서 준 것입니다.

 

구본창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이 많아요. 강운구 선생은 약간 이론적입니다. 반면 구본창 선생은 이론적이지는 않지만 이론을 개입시키기에 좋아요. 구본창 선생이 내 글을 보더니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묻더군요. 강운구 선생과는 자주 만나고 식사도 하는데, 구본창 선생과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강운구 선생의 생각과 내 생각은 거의 같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구본창 선생이 사진 찍을 때의 감정과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마 전혀 다를 거예요.

 

 

 

 

 

 

[황현산 문학비평가] 밤이 선생이다 #1 – 황현산을 만나다② 로 이어집니다...

 

 


인터뷰 참여자:

김소원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

김주영 아리랑정보도서관 관장

김호진 아리랑정보도서관 사서

이종찬 문인사 기획전 아카이빙 코디네이터

장유정 성북예술창작터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