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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박태원] 소설가 구보 박태원을 기억하다


 박태원의 생애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2.7.~1986.7.10.)은 1909년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 한학을 익히고 고대소설을 읽다가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합니다.


1929년 제일고보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세이대학 상과에 들어간 박태원은


학교 수업보다는 영화·미술·음악 등에 흥미를 느끼고 거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최신 유행하는 머리와 차림새로 현대적 분위기에 젖어 술집과 영화관 등을 돌아다니던 그는


결국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옵니다.


<출처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누 님

 

 

구보 박태원

훼를치며자진닭이

세번울제가신누님

초생달이저넘을제

꼭오마고하시드니

보름지나그믐돼도

가신누님안오시네


우리누님나주고간

괴불주머니속에를

세번이나세배돈이

들어가도안오시네

주머니의수논복사

떨어져도안오시네


강남제비왔길래로

누님소식뭇잿더니

뚝떨치고가는것은

발아지도안는박씨

뒷동산에고히심어

덩굴러도안오시네


월간 『조선문단』 3권 1호 1926년 3월호 발표


위 시는 192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누님>으로,이 작품과 1930년 《신생(新生)》에 발표한 단편소설 <수염>으로 박태원은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 구인회 활동 시 박태원 - 출처 : 청송의 벽 사이버박물관>


박태원은 1933년 프로 문단의 지나친 정치성에 반하며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이 속한 ‘구인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구인회 가입과 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 이상이 그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삽화


1934년 <중앙일보>에 이상이 그린 삽화와 함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하면서


그는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릅니다. 이 시기에 <천변풍경>, <여인성장> 등을 발표하였고, 


근대시기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들의 생활, 서울말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이름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호 구보(仇甫)는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쓰고 난 뒤부터 붙게 된 그의 호입니다.


그런데 ‘거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 호에 대해 박태원 자신을 비롯해


친구들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얼마 뒤 이것은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구보(丘甫)로 바뀌게 됩니다.


박태원은 구인회 회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활과 창작을 영위해 나가는데,


그중에서도 이태준과는 먼 뒷날까지 뜻을 같이하는 평생의 지우 관계를 맺습니다.


자신을 천재로 여긴 것도 마찬가지고 강한 실험정신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열정을 지닌 점에서도


서로 비슷한 이상과도 각별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박태원은 1937년 <성탄제>, 1939년 <골목 안>, <명확한 전망>, 1941년 <여인 성장> 등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풍속을 그린 세태 소설을 계속 발표합니다.


그러다가 해방 직전인 1943년께에는 <수호전> 같은 동양고전의 번역이나 역사물에도 손을 댑니다.


해방 뒤, 박태원은 곧바로 본격 창작에 나서지 않고 <조선독립 순국열사전>, <약산과 의열단> 등


항일투사와 애국자들의 전기에 매달립니다. 1949년에 들어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를 다룬 장편 <금은탑>을 발표한


그는 1950년께 절친한 문우인 이태준의 영향으로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북 뒤 박태원은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당의 눈 밖에 나서 강제노동수용소로 쫓겨나게 됩니다.


약 4년간 평남 강서지방의 한 집단농장에 물러나 강제노동을 하게 되고,


이 시기에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맙니다.


1960년에 다시 작가로 복귀했을 때, 그는 이미 심한 영양실조와 함께 시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급기야 1965년에는 실명을 하게 됩니다.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도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소설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의 도입부의 성격을 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1/2부)는 1963~64년 사이에 발표합니다.


그는 1965년께 망막염을 앓아 실명하고 1975년 뇌졸중으로 전신불수가 되고 나서도 집필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북에서 얻은 아내에게 구술하는 방식으로 1977년부터 3부작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1984년「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한 뒤, 그는 1986년 7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태원의 대표작 <천변풍경>

 



<천변풍경 초판 표지 -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한국 모더니즘 소설, 세태소설의 걸작으로 뽑히는 <천변풍경>은 삽화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작품으로,


거의 70여명에 이르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 일상을 간결한 묘사 위주로 써내려간 작품입니다. 



<사진 : 옛날 청계천의 모습 - 출처 : 고운산장 블로그 http://blog.daum.net/gounsanjang/333>


이 무렵 박태원의 집은 서울 청계천 언저리에 있었고,


당시 청계천 일대는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는 풍경과 막 박동을 시작한 근대 도시의 풍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이 청계천변의 세태와 풍속을 담아낸 작품이 바로 <천변풍경>입니다.


박태원이 <천변풍경>을 집필할 때 쓴 방법이 매우 독특해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합니다.


 요사이 자주 시내 낙랑파라는 다점에서 드나드는데 가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그 다점 한복판에서


펜을 들고 묵상을 하시며 창작 하신다니 좀 더 씨가 유명해진다면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서 창작을 하실 것이니…….


― C생, 「문단 Gossip」, 《예술》(1935. 4.)


박태원 스스로도 늘 대학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기에 도시의 풍물과 군중의 모습을 적고,


상상력만으로는 소설이 되지 않아 실물을 눈으로 보기 위해 도심지를 오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박태원과 성북

 

 


<사진 : 심우장 - 출처 : 천사는 여행중 블로그 : http://blog.naver.com/lsh5755/220274936935>


박태원은 돈암동에 땅을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약산과 의열단>의 인세 대신 성북동에 집을 받아 이사하였습니다.


이 집은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던 초가집이었습니다.


2013년 조성된 ‘만해의 산책공원’ 부근이 옛 집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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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 덕성여자대학교 조아영